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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海一滴

W. 도리 (DR)

 

 

 

그 어떤 인간이 감히 그 빛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비와 맞닿아 일렁이는 바닷물 사이에 작게 반짝이던 빛과 굵고 까무잡잡한 손가락의 끝부분을 마찰시킴으로서 시작된 지루한 옛날 사랑 이야기. 때는 바야흐로 옛날옛적, 장마의 시작이던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려 온 세상을 담고 있던 그 칠월의 이야기.

 

그 날은 정말이지 기운 빠지는 날씨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하늘은 온통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있어 햇빛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불어오는 바람마저 열기를 잔뜩 머금어 혹 바람이 뺨이라도 슬쩍 쓰담고 간다면 기분이 퍽 불쾌해지기 십상인 그런 날씨였다. 그런 날씨로 하여금 알 수 있었다. 칠월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잔뜩 더운 김을 머금은 바람 사이에도, 빗물이 잔뜩 스며들고 있는 흙들 사이에서도, 비에 푹 젖은 길거리의 풀들 사이에서도 초여름 향기를 찾을 수 있었다. 곳곳에서 살살 제 존재를 알리는 여름 향기에 무방비하게 취해 있는다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며칠째 내리는 비가 금세라도 그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 초여름 향기에 취해 내일은 해가 떠오를거라는 실없는 희망감을 품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김없이 하늘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려왔다.

 

김수찬은 어두컴컴한 제 주위를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분명 밤은 아닐 터인데. 수찬이 제 이마를 타고 죽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밀어냈다. 온 세상이 컴컴했다. 제가 풀 향에 취해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수찬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내 제 눈에 들어온 하늘을 빈틈없이 메운 잿빛 구름들을 보고서야 날이 이리 어두운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는 결론을 내린 수찬이 흙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던 제 큰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리 비가 오는데 밖에서 더 시간을 흘려보냈다가는 머리가 푹 젖어들어 집에 돌아가기 민망한 꼴이 될 것을 미리 예감한 그는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집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어째서인지 조금은 무거워보였다. 그래서, 이 김수찬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하면, 김 가네 막내 도련님. 온 마을의 귀염둥이이자 제 아버지의 애물단지. 이 정도만 하더라도 그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했다고 보아도 무관할 정도였다. 아들들을 전부 벼슬에 오르게 한 뒤 제 어깨를 잔뜩 펴고자 하는 제 아비의 욕심에는 맞지 않게, 그는 정말이지 너무나 평범한 삶을 즐겼다. 하루는 동네 구석에서 먹고 자며 밥을 빌어 먹고 사는 거지와 옷을 바꿔 입고는 오일장 틈바구니에 벌어진 춤판에 끼어서 한바탕 춤을 추고 집에 돌아오지를 않나, 미친 사람마냥 하루종일 마을 끝에 있는 바닷가의 돌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다 저어 끝을 쳐다보고 있질 않나. 늘 모두에게 짐짓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기 좋은 짓들을 벌이고 다녔지만서도 그는 제 아비와 식구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연하겠지만- 제 집에 싫증이 난 지 오래였다. 제 속마음을 누군가가 듣는다면 저어 김 가네 으리으리한 부잣집이 싫다니 배가 잔뜩 불렀다, 하는 내용의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겠지만. 그는, 김수찬은 제 집이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그 넓디넓은 공간이 답답했다. 수찬은 탁 트인 바다가 좋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는 빗물에 옷이 더 젖기 전에 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건만. 수찬은 그날따라 고 잿빛 구름들이 하늘에서 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그를 불렀고, 저 머얼리 보이는 바다가 그를 이끌었다. 그는 저를 향한 자연의 부름마저 부정할 정도로 썩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하늘에. 또 바다에 응했다. 걸음이 점점 가벼워져갔다. 수찬은 바다가 좋았다.

 

그가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모래사장은 이미 비에 푹 젖어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수찬의 발을 자글자글한 모래 알갱이들의 품에 가둬 놓기 일쑤였고, 푸른 빛 바다는 온데간데없고 하늘의 색을 머금어 칙칙해진 회색 빛 바닷물만이 수찬을 반기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하늘의 부름이니 뭐니, 하며 이 물난리통에 바다에 올 생각을 하다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제가 잠시 미쳤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수찬의 맑은 눈 안에 작은 빛이 들었다. 회색 빛 바다 안에서 빛나고있는 작디작은 무언가가 수찬의 시선을 끌었다. 물고기라기엔 터무니없이 컸고, 조개 껍질이라기엔 모양이 너무나 특이했다. 수찬은 뭐에 홀린 듯 바다 속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긴 옷이 점점 물에 잠겨들어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찬은 점점 바다의 품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바닷물이 턱까지 차오르자 마침내 수찬은 그 존재 불분명의 빛 덩어리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수찬은 옷이 물을 잔뜩 머금어 들어올리기조차 힘든 제 팔을 슬슬 들어올려 제 손가락을 그 빛과 마찰시켰다.

 

바람 소리가 미친 듯이 귀를 울렸다. 제가 바다 속에 잠겨 있지만 않았대도 이 바람을 맞았다면 필시 날아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빛은 여전히 수찬의 손가락과 맞닿은 채로 반짝였다. 그리고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 빛과는 상반되게, 바다는 조금의 예고도 없이 한 순간 수찬을 향해 무섭게 성을 냈다. 바닷물이 크게 일렁였다. 빛이 금세라도 수찬을 집어삼킬 듯 점점 커졌다. 물의 일렁거림이 조금 더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수찬은 저 멀리서 크게 일어나면서 제게 점점 다가오는 파도를 볼 수 있었다.

 

바다가 다시 일렁였다.

 

.

 

.

 

.

 

그리고 마침내 그를 집어삼켰다.

 

.

 

.

 

.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서운 기세로 밀려오는 거센 바닷바람과 함께. 바다가 그를 집어삼켰다. 거센 물살에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지만, 필사적으로 눈을 뜬 수찬이 본 것은 단 하나의 빛이었다. , 그리고 빛나는 비늘... 그리고 백옥같이 흰 피부. ...인어였다. 갑자기 밀려들어온 파도와 동행한 그 생명체가 인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을 때 즈음, 수찬은 제가 목격한 그 빛나는 생명체에 의해 물 위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 인어가 수찬을 들어올렸지만. 숨 한 번 뱉을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수찬과 그 인어는 꼭 붙은 채로 뭍 가까이에 있는 돌덩이들에 닿을 수 있었다. 인어는 수찬의 몸을 반쯤 돌에 올려주었다. 그리고는 저도 돌을 짚고 나와 수찬의 옷을 헤집으며 수찬의 상태를 살폈다. 수찬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인어는 바삐 놀리던 손을 멈추고 수찬과 시선을 맞췄다. 최악의 날씨 아래서 최악의 꼴을 한 채로 둘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수찬은 갑자기 밀려온 거센 물살에 꽤나 놀랐으므로,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어 그저 가만히 누워 저를 빤히 바라보는 인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흑진주마냥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백옥같이 흰 피부. 물 속에 살면서도 웬만한 인간마냥 새빨간 입술. 없는 정신에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어가 흰 손을 뻗어 수찬의 얼굴을 쓰담았다. 그의 얼굴에 닿은 손은 놀랍게도 따듯했다. 그 인어는 꼬리 끝에 있는 지느러미를 바닷물에 담근 채로 바위에 걸터앉아 누워있는 수찬의 찬 뺨을 오래간 쓰담았다. 수찬이 그 손길을 피할 생각도 없이 빤히 제 얼굴을 쳐다보고있자 굳어있던 인어의 표정이 살살 풀어졌다. 살살 말려 올라가던 그 입꼬리가, 그 입이 이윽고 벌어졌다.

 

"후의 일은 어쩌자고 바보같이 쫓아왔습니까. 내가 그렇게 궁금하덥니까?"

 

수찬은 그 날 웃는 인어의 눈동자에서 그 영롱히 빛나 제 시선을 온통 빼앗아버린 빛 덩어리를 보았다. 인어의 조곤조곤한 물음에 답하려 입을 떼려 했으나 퍼렇게 질린 제 입술에서 새 나오는 소리라고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끝이었다. 인어의 입꼬리가 더욱 깊이 말려들어갔다. 하하하. 그가 소리 내 웃었다.

 

"답을 듣고자 한 질문이 아니니 가만히 계시지요. 단단히 놀랬을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답은 나중에 듣기로 합시다. 맑은 날, 꼭 나를 다시 찾아와 주세요. 그 때는 무식하게 이리 바다에 뛰어들지 말구요. 바닷물에 짧게 입 맞춰준다면 내가 다시 가겠습니다. 은인 얼굴은 다시 한 번 보러 와야 하지 않겠어요."

 

인어가 얇고 흰 제 손가락을 쭉 펴 수찬의 머리칼을 한 번 매만지고는 고 흰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수찬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손에 들린 비늘을 집어넣었다. 그 인어의 손만큼이나 따스한 온기가 비늘이 들어간 입 안에서부터 천천히 퍼져나가 온 몸에 온기가 도나 싶더니, 수찬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제 육신은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제가 그리 돌아가기를 갈망하던 제 집 안의 따스한 방 안이었다. 빛이 궁금하다며 괜히 바다에 들어갔다 꼴좋게 물에 푹 빠진 덕에 고뿔이 든 것인지, 제가 삼킨 인어의 일부분이 타고 흘러내려갔을 목 주위가 미친듯이 홧홧했다. 그 인어를 가만 누워 곱씹을수록 꼭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검은 생머리, 흰 피부, 빨간 입술이면 필시 처녀귀신이라더니..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수찬의 몸이 잠에 취해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지방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수찬이 그 날 비에 홀랑 젖은 탓에 든 고뿔이 거의 나아 갈 즈음엔 유월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제법 날은 후덥지근했으며,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면 햇볕이 너무 뜨거워 피부가 따가워질 지경이었다. 아직도 가끔은 재채기가 막 튀어나올 때가 있지만서도 수찬은 몸이 어느 정도 낫자 당장 채비를 해 다시 바다로 나갔다. 꼼짝없이 집에 누워 앓고만 있을 때에도, 잠이 들었을 때에도 제 은인의 얼굴이 떠나가지 않은 탓이었다. 제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면서 조곤조곤 눈동자 속만큼이나 맑은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걸어오던 그 신비로운 아이가 너무나 궁금했다. 수찬은 그런 연유로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 끔찍했던 며칠 전의 날씨와는 상반되게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푸른 빛 하늘과 그 하늘을 머금고있는 넓은 바다까지 모든 것이 수찬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었다. 수찬이 바닷물 앞에 무릎꿇었다. 손으로 한 움큼 바닷물을 퍼 냈다. 자꾸만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바닷물을 다시 그러쥐고, 다시 놓아주고를 반복하더니 얼마 안 있어 제 손 안에 든 투명한 그 바닷물에 살짝 입을 맞췄다. 바다가 다시 빛났다.

 

"기다렸어요."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일찍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그 날 보았던 해사한 미소가 다시 인어의 얼굴에 떠올랐다. 수찬이 큰 바위 하나를 골라 슬쩍 걸터앉으니 그 인어도 따라와 일전에 그랬듯이 지느러미만을 바다에 집어넣고는 수찬의 옆에 걸터앉았다. 둘의 시선이 다시 서로를 향했다.

 

"그으, 그 날엔 참으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인걸요."

 

"그대가 사람이 아닌 것은 알겠습니다. 고 빛나는 꼬리를 보아하니 신성한 존재임은 알겠으나, 결례를 한 번 더 범하자면 혹 이름 석 자라도 알 수 있을까 해서..."

 

"괜찮아요. 나라도 궁금했겠는걸. 나는 모두가 날 향해 희재라고 부르덥니다. 희재라고 불러 주세요."

 

"수찬입니다. 김수찬."

 

"댁과 퍽 어울립니다. 내 존재를 궁금히 여겼다니 이것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대가 보시는 것과 다를 것 없이 저는 물에서 사는 사람, 해서 인어라고. 저를 본 인간들은 날 이리 불렀어요. 지느러미가 참으로 흉측하기는 하나 번쩍번쩍 빛나니 잡아 가면 값을 비싸게 쳐줄것같다며 사냥꾼들에게 잡혀 갈 뻔도 했구요."

 

"...아름답기만 한걸요. 제가 그대를 이리 마주보게 된 연유도 그 덕 아닙니까."

 

수찬의 말에 희재가 다시 깔깔 웃었다. 참으로 특이한 분이세요. 희재의 말에 수찬도 웃었다. 여름 향을 잔뜩 머금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희재의 까만 머리칼을 헤집어놓았다. 흰 피부를 가진 인어의 새까만 생머리가 햇빛 아래서 바람에 휘날리고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퍽이나 꿈같은 광경 아니겠는가. 수찬은 그대로 넋을 잃고 희재를 바라보았다. 희재가 웃는 것을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제가 다 두근거리는 것이, 사랑에 빠진 꼴과 다름없었다. 신성한 존재를 앞에 두고 있어 긴장한 탓이라며 애써 자신을 달래고서야 다시 수찬은 희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희재가 다시 수찬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넋을 놓고 있는 수찬을 향해 입을 뗐다.

 

"으음, 말 편하게 하셔도 관계없습니다. 먼저 수찬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 그야 당연히.. 그러니까 제 말은-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수찬이 형도 절 희재야, 하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쩐지 요 밝은 햇빛이 그것을 보장해주기라도 하듯 날씨가 믿을 수 없이 좋았다. 희재의 꼬리가 햇빛을 받아 더욱이 반짝였고, 그것은 수찬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수찬에게 있어 희재는 머리부터 -발 끝- 지느러미까지 모든 것이 꿈만 같은 존재였다. 희재는 빛났다. 또한 본인은 죽을 때까지, 어쩌면 그 이후에도 쭉 모르겠지만- 수찬 역시 그 쨍한 햇빛이 감싸고있는 드넓은 바다 위에서, 희재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

 

둘은 다르고 또 같았다. 서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달랐지만, 그 이유에서 또 잘 맞았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서인지 더욱 서로에게 깊은 곳까지 털어놓을 수 있었다. 둘은 많이 만났다. 정말 많이.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지 않는 한 둘은 매일 만났다. 햇빛이 쨍한 날이던, 여우비가 내리는 날이던, 너무나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르는 날이던 둘은 매일 그 바위 위에 똑같은 자세로 걸터앉아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희재는 희재대로의 제 얘기를, 수찬은 수찬대로 제 이야기를 했으며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 둘은 그저 귀를 기울일 뿐, 그게 다였다. 또한 둘은 사랑을 했다. 사랑은 둘이 처음 만났던 그 날 내리던 비가 스며든 풀에서 살며시 느껴지던 초여름 향기처럼 살며시, 또 천천히 찾아왔다. 수찬은 희재가 저를 사랑하는 것을 알았고, 희재는 수찬이 저를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저 둘 모두 막연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가 틀렸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 나는 형이 없어지면 확 저 멀리 산다는 고래한테 가 버려서 잡아먹혀 죽어 버릴 겁니다."

 

언제부터인지 희재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들을 죽 늘어놓고는 했다. 그러면서 항상 수찬에게 강조하는 것이, 인어는 원래 인간하고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인간과 사랑에 빠진 인어는 영생을 뺏기고 남은 생애간 다시는 물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나간다면 얼마 못 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나. 인간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되 조금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는 게 인어들 세상의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희재가 수찬에게 늘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수찬은 늘 둘이 사랑하는 건 어떻게 알구 그런 벌을 줘? 하고 코웃음치며 되묻고는 했지만-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희재는 답을 내놓는 대신에 수찬의 귓볼에 짧게 입맞춤하곤 했다. 허나 하루는 집요하게 캐묻는 수찬에게 희재가 저도 확실치 않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젖히며 조심스레 말을 전해 주지 뭔가.

 

"그으, 사랑에 빠진 인어는 다 아는 수가 있대요."

 

", 다리라도 생긴다니?"

 

"그건... 확실히 아닐 테죠. 정확하지는 않은데.. 조부모님 말씀하시기를 뒷목에 비늘이 자란댔는데."

 

"역린(逆鱗)?"

 

희재가 확신하지 못하며 고개를 살짝 주억였다. 그리곤 제 뒷목을 흰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보더니 제 옆에 누워있듯 앉아있는 수찬의 뒷목에도 제 찬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인어의 손가락이 닿은 뒷목에서부터 냉기가 살살 퍼져 수찬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 하는 거야, 히재- 수찬이 희재의 손가락이 닿았던 그 자리를 제 커다란 손으로 감싸쥐며 앓는 소리를 냈다. 처음 봤을 때는 네 손이 참 따수웠는데. 하고 툴툴대는 수찬을 빤히 쳐다보던 희재가 제 흰 얼굴을 수찬의 까무잡잡하게 탄 얼굴에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리고는 조금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수찬의 입술에 희재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방금 전 제 목에 닿았던 차디찬 손가락이 무색하게 희재의 입술은 상상 이상으로 더 따듯했고, 또 포근했다. 확 달아오른 수찬의 얼굴을 바라보며 깔깔 웃는 희재를 향해 수찬이 원망스럽단 목소리로 입술까지 훔쳐 놓고 또 우리만한 벗이 어디 있냐고 선 그을 거면서 유감스럽게시리 왜 이러냐, 하구 되묻자 희재는 친구 사이에도 입맞춤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요? 하고 하하 웃으며 받아쳤다. 입술을 매만지며 제 빨개진 귀를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수찬을 바라보는 희재의 얼굴에는 어쩐지 조금의 슬픔이 묻어났다. 희재가 다시 손가락으로 뒷목을 쓸었다. 목에서 까칠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

 

요 며칠 희재가 보이질 않는다. 굳이 짠 바닷물에 입맞추지 않더라도 수찬이 오기 전부터 바닷물 위로 제 머리를 내밀고는 한참을 기다려주던 희재였는데 아무리 바닷물에 입을 맞추어도 그저 짠 맛만 아직도 희재의 온기가 남아있는 입술의 겉표면에 맴돌 뿐 희재는 지느러미 끝도 비추질 않았다. 일전의 입맞춤 때 너무 애를 밀어내 화가 난 건지 괜시리 미안해져 수찬은 모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전 세게 밀려오던 파도의 영향인지 아직 축축한 모래 위에 수찬은 손가락을 뻗어 글씨를 써냈다. 히재 미안해- 너무 딱딱한가? 옆에는 우는 사람 얼굴도 그려넣었다. 투둑. 투둑. 제 머리칼을 두들기는 차가운 무언가에 수찬이 고개를 들었다. 먹구름이 잔뜩 껴 금방이라도 비가 미친 듯이 내릴 것만 같았다. 비 오면 이거 씻겨 내려갈 텐데. 수찬이 제가 그려낸 작은 글씨들을 내려다보았다. , 글이야 언제든 다시 와 언제든 다시 적을 수도 있고- 희재를 만난다면 한껏 미안한 목소리를 내어 말로 해 줄 수도 있는 노릇이니 아무렴 좋다고 생각한 수찬이 제 몸을 일으켜세웠다. 수찬이 희재를 못 본지가 오늘로서 7일 된 날이었다.

 

한편 그 날 수찬의 꿈자리는 영 사나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내용인지 깨어나자마자 꿈의 내용은 금방 잊혀졌건만, 유독 뚜렷하게 제 기억 속에 남은 울고 있는 희재가 마음에 걸리지 뭔가. 다시 잠을 청했으나 울고 있던 꿈 속의 제 사랑스러운 벗에게 계속 마음이 쓰여 결국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찬은 그날 예정보다 일찍 집 밖으로 나갔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수탉이 울기도 훨씬 전의 시각이었다. 은은한 달빛에 침침한 눈을 맡기고 발길이 이끄는 대로 따르자 어김없이 그 바닷가 아니겠는가. 이 야심한 밤에 누가 바닷물에 세안이라도 하는 것인지 어디선가 자꾸 물이 첨벙대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 소리가 아닌가, 했으나 파도가 철썩, 할 때와 영 시간대가 빗나갔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첨벙대는 물 소리 대신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 더 깊은 바다에서 새어나왔다. 소리의 근원을 의문스레 여긴 수찬이 자리를 옮겨 큰 돌 위에 서자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조금 떨어진 바다 위에서 그 소리들의 모든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연한 달빛에 의지해 볼 수밖에는 없지만 확신할 수 있다. 저 바다 위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작은 생명체는 두말할 것 없이 희재였다.

 

"히재."

 

희재는 답이 없었다.

 

"희재."

 

희재가 손으로 물을 퍼 올리는 행동을 지속했다.

 

"희재야."

 

희재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마냥 손으로 퍼올린 물을 뒷목에 붓고는 피가 날 세라 긁어댔다.

 

"김희재!"

 

그제서야 희재는 하던 짓을 멈추고 수찬이 서 있는 돌을 바라봤다. 달빛이 너무 연한 탓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수찬은 희재의 표정이 복잡하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희재가 바다로 돌아가려는 듯 자세를 취한다. 수찬이 다급히 다시 희재를 불러 세웠다. 너 진짜 이번에도 도망치면 형 여기서 뛰어 내리는 줄로만 알어. 형이라고 유감스러운 협박하는 게 좋다는 것두 아니지만. 형 물에서 못 떠오르는 거 히재도 알고 있지? 새벽의 스산한 바닷가엔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와 소리치는 수찬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희재는 잠시 고민하더니 수찬의 쪽으로 다가왔다. 둘은 다시 둘만의 공간이던 작은 돌에 걸터앉는다. 조금 더 달빛을 잘 받는 자리에 앉게 되자 희재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이 선명히 빛난다. 무슨 연유로 이리 이른 시각에 홀로 바다에 올라와 울고 있었는지를, 자칫하면 피가 날 수도 있었는데 어찌 제 뒷목을 뭐에 홀린 마냥 긁었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수찬은 희재의 입이 열리기를 앉아서 가만 기다렸다. 일주일하고 하루만에 바라본 희재의 얼굴은 어딘가 수척해보였다. 수찬이 손을 뻗어 흐트러진 희재의 머리를 빗어주듯 쓰담았다. 그러다 여실히 드러난 희재의 뒷목에서 무언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었지만, 뭉친 머리카락 덩어리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찬은 희재가 말했던 역린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는 그저 희재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수찬이 형."

 

"?"

 

"사랑해요."

 

수찬이 놀라 희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수찬의 큰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너 지금 뭐라고, 수찬의 뒷말은 희재의 깊은 입맞춤에 가로막혔다. 희재의 찬 손가락이 수찬의 살결에 온전히 닿았다. 제게 입맞춘 희재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 수찬은 감히 희재를 밀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입술까지 흘러내린 희재의 눈물은 희재의 혀가 수찬의 입 속을 파고들 때 섞여 들어갔다. 그 날 둘의 마지막 입맞춤은 퍽이나 짰다. 희재를 불러 내려고 수찬이 수도 없이 바닷물에 입술을 맞댈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짠 맛이 났다. 수찬이 크고 뜨신 제 손을 희재의 뒷목에 올렸다. 꺼칠꺼칠한 살결 사이로 희재의 꼬리를 구성한 것과 같은 비늘이 파고들고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희재가 전에 흘리듯 말한 역린의 존재이유가 떠올랐는지 수찬은 제 입술을 탐하는 희재를 살짝 품에서 떼어내고는 어느새 제 눈에도 그렁그렁하게 매달려있는 눈물을 뒤로한 채로 희재에게 뭐라뭐라 중얼거렸지만 끝내 그 말은 수찬의 입 속에서 잘게 부서져 희재에게 닿지 못했다.

 

"미안해요."

 

"미안할 것이 뭐 있다고."

 

"....사랑해서?"

 

희재가 말을 뱉고 나서 씁쓸하게 웃었다. 웃는 희재는 언제나 찬란하게 빛났고, 또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다른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찼다. 수찬이 차갑기 그지없는 희재의 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희재가 제 두 뺨을 수찬에게 맡긴 채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야속하게 그 날의 해는 떠오르고만 있었다.

 

"오늘 이리 수찬 형을 마주치게 되었으니 해가 뜨면 이제 정말 우리의 마지막 안녕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죽을 때까지 다시 뭍을 보러 나오지 못할 테고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사랑만큼은 진실되었습니다."

 

"....."

 

"마지막 인사인걸요. 형이 날 이리 섭하게 보내실 거라면 남은 생 억울함에 살아갈 것 같은데."

 

"...히재. 히재야. 희재야. 희재야."

 

", 수찬이 형."

 

"...네가 나의 온전한 첫 사랑이었어."

 

"..저도요."

 

해가 점점 지평선 너머에서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한 줄기 햇빛이 희재의 얼굴을 비췄다.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다름없이 희재는 수찬의 유일한 빛이 되어주고 있었다. 희재는 수찬을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수찬의 마지막 부탁이 무엇일지 알기라도 한다는듯이 희재는 제 눈물 자국들을 전부 손으로 닦아내더니 햇빛을 등지고 반쯤 물에 잠겨 수찬을 바라보았다. 희재는 제 뒤에서 떠오르는 해보다 더욱 빛을 내며 웃음지었다. 씁쓸하거나 반쯤 우는 웃음이 아닌 그저 수찬이 기억하던 웃을 때 반짝이던 희재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마지막은 둘이 함께한 수많은 날보다 더 특별하다거나, 더 아름답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제게 잘 가라고 인사해주는 희재의 얼굴이나, 서서 그런 희재를 지켜보는 수찬이나 모든 것이 언제나와 같았다.

 

"잘 가."

 

"...다시 생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내게 사랑한다 속삭여줘요."

 

", 그럴게."

 

"사랑해."

 

".... 나도."

 

그 말을 끝으로 희재는 사라졌다.

 

*

 

 

 

-

 

.

 

.

 

.

 

김수찬은 바다에 가는 시간이 늘었다. 이전에도 짧은 편은 아니었으나,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바다에 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관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먹었으며,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잠을 잤다. 희재로 가득차있었던 지난 일 년이 바다 위에서 시간이 흐를 수록 잘게 흩어지고만 있었다. 몇 개월이 흘렀으나 아직 희재의 얼굴은 또렷히 수찬의 머릿속에 남아있었으며, 아직도 히재야- 하고 부르면 제 어깨에 고개를 묻어오며 용건을 물어 줄 것만 같았다. 수찬은 가끔 바닷가에 널려있는 조개 껍데기 사이로 앞으로 다시는 부를 수 없을 이름을 불렀다. 벌어진 조개 껍데기 안이 희재를 부르는 수찬의 음성으로 가득찼다. 그 새엔 세상은 수찬을 남겨 둔 채로 한 계절, 두 계절, 세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비가 퍼붓던 날, 그 칠월이 점점 수찬을 향해 다가왔다.

 

수찬은 그 날도 어김없이 바다로 나갔다.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조차 너무 궂은 날씨에 혀를 내두르며 집으로 돌아갔건만, 큰 부잣집의 막내 도련님은 그 날도 바닷가에 앉아있었다. 수찬이 앉아있던 바위 위를 빗물이 쓸고 지나갔고, 또한 빗물은 수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고 머리를 쓰담았다. 칠 월의 여섯째 날 수찬은 희재와 영영 이별한 뒤 처음으로 낮에 바다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로 넘어가는 날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며칠간 하늘이 뚫릴 세라 왔던 비가 그 시간대에만은 유독 뜸했다. 바닷물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수찬이 맨 처음 보았던 희재의 빛처럼. 수찬은 제가 이대로 네가 가버리면 뛰어내릴 것이라며 희재를 협박했던 큰 바위에 올라갔다. 온 바다가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수찬이 바위의 끝에서 허공을 향해 작은 숨을 뱉었다. 수찬의 다리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

 

.

 

수찬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바다 안에 있었다. 바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지금껏 희재와 함께 보았던 무수히 많은 밤하늘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물을 먹어 잔뜩 무거워진 옷을 벗어던졌다. 무작정 저 어두컴컴한 바다 속으로 팔을 움직였다. 숨이 점점 차올랐지만 수찬은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다면 저도 다음 생은 희재와 같은 인어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조차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점점 열심히 물에 저항하던 수찬의 몸짓이 느려져만 갔다. 수찬이 자의적으로 제 팔짓을 멈추었다.

 

저 멀리서 빛나는 무언가가 헤엄쳐왔다.

 

그 무언가는 수찬의 손을 맞잡았다. 또 숨을 불어넣었으며 그를 다시 뭍으로 밀어냈다. 뭍의 공기와 맞닿자 그 생명체의 빛나는 피부가 점점 으스러질것만 같았다. 그것은 수찬에게 입을 맞추었다. 마침내 공기 중에 섞여 들어갈법한 모양새가 된 그것이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형체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알아보기 힘들게 투명해진 상태였다. 그것, 인어는 다시 저 어두컴컴한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한껏 빛나는 제 존재를 과시하면서. 수찬이 정신을 차렸을 때 손에 쥐어져있는 흰 색 진주만이 그날 밤 그것의 존재를 증명해냈다. 수찬은 그 날 정말 마지막으로 희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뒤 수찬의 행방은 그 마을 사람 누구도 본 일이 없다고만 전해졌다. 추측하건대, 김수찬은 죽을 때까지 파도 소리와, 또 희재와 함께했다. 수찬의 마지막 칠월 칠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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